내가 신촌에서 일을 하기 전 면접형식으로 사장님을 만난 자리에서 했던 가장 큰 실수는 간단한 안주는 내가 만들 수 있다고 했던 거야. 희진 언니가 혹시라도 안될 수 있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나에게 온 (그때는)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걸 잡고 싶었던 나는, 주방이 좁아 상주할 주방 직원을 구하기 힘들 것 같다는 사장님 말에 저런 대답을 해버린 거지. 볼레로 사장님에게 전수받은 찹스테이크 만드는 방법 외에도 나는 원래 음식을 곧잘 하는 편이었으니 간단한 안주 만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거였어. 물론 내가 안주까지 만든다고 해서 사장님이 날 채용한 건 아니었겠지만 난 그때 그냥 그런 애였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어필해서 인정받고 싶은 애.
지금도 인정받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때는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애였다면, 지금은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점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인정이잖아. 그때는 그런 식으로 나를 증명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 내가 보기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주길 바랬어. 하지만 지금은 타인을 위해서 나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건 나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
신촌 가게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어. 가끔 희진 언니의 단골손님 몇 명이 오기도 했고, 내 친구들도 몇 명 왔던 것 같아. 아르바이트생으로 남자를 한 명 뽑았는데 3일 만에 말없이 안 나오더라고, 그리고 그다음 뽑힌 사람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였는데 말이 엄청 잘 통했어. 그래서 손님이 없을 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우리를 불러서 엄청 혼내더라고.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떠드는게 꼴배기 싫었던 거지. 근데 그 혼내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꼰대스러움이 너무 불쾌했어. 마치 학생을 혼내는 학생주임 같은 느낌에 황당했지. 그때가 앞으로 내가 여기서 오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된 지점이었던 것 같네.
나와 떠들다가 혼난 오빠도 그다음 날부터 말없이 안 나오더라. 화가 난 사장님은 남자 새끼들 못 믿겠다고 이제 안 뽑겠다며 그냥 본인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지난번에 말했듯 '공부만 하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를 다니던 중 허황된 로망을 품고 회사를 그만둔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린 그릇된 로맨티시스트' 사장님은 (당연히)일머리가 더럽게 없었고, 서빙도 제대로 못했어. 쟁반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증권회사를 다녀서 그런가 돈 계산은 잘하더라. 한편 나는 아르바이트와는 엄연히 다른 '직원'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희진 언니와 둘이서 잘해보자고 생각했어. 희진 언니도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기에 나보다 훨씬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돈 계산을 제외한 가게의 모든 일은 희진 언니와 내가 맡아서 했지.
우리 가게는 흔히 말하는 오픈빨이 이미 떨어진 뒤 한참 됐고 하루 매상이 겨우 십만 원쯤 나오던 날이 계속되었어. 그래서 우리는 출근 후 밥을 배달시켜먹는 것까지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지. 그래도 다행인 건 연말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에 신촌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어. 다행이 우리 가게도 연말의 영향으로 조금씩 손님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나의 '골뱅이 무침'을 맛본 단골손님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지.
혹시 알고 있으려나. 내가 일 년 중 가장 혐오하는 날이자 내 생일인 '12월 24일' 말이야. 몰랐다면 알려주고 싶은데 지금은 나의 흑역사 중 베스트로 꼽는 A와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알려줄게. 그런데 왜 아직도 A 얘기가 안 나오냐고?
내가 볼레로에서 일할 때는 모든 일이 쉬웠다고 했잖아. 그래서 난 A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어. 그런데 신촌에서는 A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게의 모든 일이 힘들고 처음인 것들도 많아서 희진 언니와 함께 지쳐가고 있던 상태였어. 그리고 매상에 대한 책임감도 더해졌지. 간섭이 거의 없었던 볼레로 사장님과 달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초보 사장이 늘 곁에 있으니 더 신경 쓰이더라. 손님이 없으면 사장님 때문에 불편하고 손님이 많으면 너무 바쁘니까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그리고 안주 주문이 많아지면서 나는 주방에만 처박혀 있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어서 '그때 왜 내가 그딴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로 점철된 날들을 보내며 열심히 골뱅이를 무치고 있었지.
일머리가 더럽게 없는 사장이지만 크리스마스이브가 대목이란 건 등신도 아는 거니까 그날을 위해 가격이 두배로 적힌 메뉴판을 만들어 둔 준비성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던 그날, 나는 역시나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고 있었어. 손님이 많아서 안주 주문이 엄청났거든. 싱글벙글 서빙하는 사장님 눈을피해 가게 화장실에서 A에게 전화를 했어.
생리를 안 한 지 두 달째였거든.
그날, 나는 산부인과에 난생처음 가봤어. 굴욕 의자에 처음 앉았을 때 그 당혹감은 아직도 너무 생생하게 느껴지는 잊을 수 없는 불편함으로 남아있어.
다행히 별건 아니었어. 아무래도 가게 때문에 바쁘고 스트레스도 많았던 상태였으니 말이야. 그래도 나는 병원에 갔었던 일을 A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의 나라면 절대로 안 그랬겠지만 그때는 그랬었어.
그런데 내가 생리를 안 해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하자 A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
"아들이야, 딸이야? ㅋ"
다른 상황이었으면 조금 짓궂은 유머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저런 말을 유머로 할만한 상황이 있긴 한 건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12월 24일, 내 생일, 처음 산부인과를 경험한 공포와 불안함이 가득했던 22살의 나는 A의 대답에 또다시 당혹감을 느끼고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어.
감정을 정리할 새도 없이 주방에 돌아가 안주를 만들고 있을 때 A에게 전화가 왔어. 좋게 생각해보면 나름 미안함의 제스처였겠지. 그걸 내가 꼭 좋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그때는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
A는 볼레로 오전 알바였던 우혁이와 동대문에서 지갑장사를 한다던 친구랑 우리 가게에 왔고 밸런타인 21년 산을 주문했어. 그러면서 뿌듯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라고. 비싼 양주를 시키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듯 보였어.
그걸 보는데 순간, 정이 확 떨어지더라.
주문한 술을 세팅해주면서 A와 나는 대화를 안 했고 못하기도 했어. A에게 정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너무 바빠서 중간에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거든. 하지만 내가 바쁜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A는 본인이 '챙김'받지 못하는 상황에 많이 섭섭해하는 눈치였어.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는 테이블 회전율이 가장 중요한 날이기도해서 오히려 내가 사장님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지. 잠시 후 A는 나에게 퇴근하면 전화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과 사라졌어.
퇴근시간을 훌쩍 넘기고 아침이 다돼서 퇴근한 나는 A에게 전화할 기력도 없었고 그냥 집에 가고싶기만 했어. 그런데 A가 친구들과 헤어졌다면서 어디냐는 연락이 왔고 바로 근처에 있다며 금세 나에게 왔는데 전 같았다면 약간 감동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날은 12월 24일이었고 A의 유머로 포장한 비겁한 말 돌리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당혹스러웠던 감정이 걔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때 서야 분노로 바뀌었고 순간 꼴 도보기 싫어지더라고. 그래서 나는 A에게 집에 간다는 말만 반복하며 택시를 잡고 있었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으로 걔에게 제대로 화를 냈던 날이었던 것 같네. A는 나의 행동과 차가운 말투에 당황한 듯 보였고 나에게 계속 같이 있자며 팔을 잡고 안 놔줬어. 하지만 뿌리치고 나는 택시를 타버렸지.
A는 내가 닫아버린 택시문을 발로차며 소리를 질렀어.
"가버려!!! 시발!!"
웃어도 돼. 나도 지금 생각하면 웃기거든. 괜히 연애하면 영화 찍는 게 아니라니까...그것도 되게 싸구려 영화.
집에 도착한 나는 쓰러져서 잠이 들었고 11시쯤 됐을까.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지.
A였어. 미안하다며 흐느끼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생각을 했어.
내가 싫어하는 내 생일도 이미 지났고,
임신도 안 했고,
그래도 생일이라고 가게에 와서 매상을 올려주려고 했던 A를.
그러면서 아까 내가 지나치게 화를 냈던 건 아닐까 하는 지나치게 어이없고 비합리적인 생각을 했지. 그래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A를 만나러 나갔지.
그리고 뭐했냐고?
아침 11시에 갈 데가 어딨겠어. 크리스마스이브와는 다르게 25일 그 시간엔 모텔에 빈방이 많거든.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출근을 안 했어. 희진 언니에게 전화가 수십 통이 왔지만 받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그 가게를 나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계속 생각했어. 밤에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했던 향미 언니를 떠올리며 그 말이 맞다며 스스로를 설득했지. 칵테일을 만들고 싶었던 내가 매일 골뱅이나 무치게 될거란 생각을 하니 더욱 확신이 들었어.
신촌 가게를 말없이 그만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며칠분의 월급을 안 받기도 했으니 가게나 나나 피차 괜찮은 거로 생각했어. 어차피 연말 지나면 장사도 안될 가게인데 잘리기 전에 내발로 그만두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없는 가게에서 희진 언니 혼자 힘들 걸 생각하니까 그건 많이 미안했어. 그리고 그 미안함에 그 뒤로 희진 언니에게 문자 한번 보내지 못했던 게 아직도 두고두고 후회로 남아있어.
가게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니 다시 엄마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어. 당분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 그래서 벼룩시장에서 찾은 당일 알바를 간간히 하며 새벽에 가끔 걸려오는 A의 전화를 받고 나가서 놀다 들어왔지.
그런데 어느 날 A가 친구를 따라 부산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어. 그러면서 가끔 연락하겠다고 하더라.
근데 A는 원래도 '가끔' 연락했었거든. A의 안부가 궁금해할 때쯤 어김없이 새벽에 울리던 벨소리에 이은 술 취한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갔고 그게 늘 반복됐었지.
그런데 거기서 더 '가끔' 연락을 한다고? 차라리 헤어지자거나 잘 지내라는 식의 힌트가 담긴 말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일하러 간다는 말뿐인 A에게 난 그냥 알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지.
A는 나에게 일하기 전에 해운대에 같이 놀러 가자고 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이서 무언가를 (섹스 말고)같이하자는 제안이었어.
그런데 나는 '안된다'는 말로 A의 기분을 상하게 해 버렸지. 내 딴에는 앞으로 더 '가끔' 보게 될 우리 사이를 통보받은 내 서운함의 표현이었어.
A는 본인의 예상과 다른 나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 듯 했고 그 뒤로 우리는 '정말 가끔'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어. 그리고 가끔 우리는 섹스만 하고 헤어졌지.
내가 당일 알바를 하는 것도 성에 안차서 게속 눈치를 주는 엄마 때문에 전에 잠깐 했던 '보조 출연' 일을 다시 시작했어. 하지만 새벽에 촬영이 끝나면 집에 돌아갈 택시비가 너무 부담돼서 오래 할 순 없었어. 그리고 보초 출연자를 관리하던 반장 새끼가 나를 성희롱한 적이 있는데 그걸 방관하던 같은 보조 출연자 언니들이 그 뒤로 나한테 텃세를 엄청 부리더라고. 어이없기도 하고 짜증 나긴 했지만 내가 제일 힘들었던 건 성희롱이나 텃세가 아닌 촬영 대기할 때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이었어. 그 시간 동안 A생각이 나서 그랬나봐.
그래서 조금 더 바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지하철 택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요즘에는 노인들이 많이 하지만 그때는 내 또래도 많이 했었거든. 길치였던 나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었어. 길을 헤매다가 너무 늦어져서 취소를 당하고 택배비를 못 받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내가 꽤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어. 덕분에 지하철 노선도를 거의 외웠고 2호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수 있게 되었지. 양주 이름이나 가격을 아는 것 보단 훨씬 활용도와 성취감이 높은 일이었어.
어느 날은 꽃배달을 한 적이 있는데 지하철역에서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연구소들이 밀집한 단지였어. 그날 마지막 배달이었고, 꽃이 망가질까 봐 신경 써서 들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매우 지쳐있었어. 게다가 마지막 배달지인 그 곳이 우리 집과 거의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갈 생각에 한숨을 쉬며 도착한 나는 벨을 눌렀어.
한참 후 열린 문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나오는 여자를 봤어. 나는 그분께 꽃바구니를 전달하고 집에 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것 같아. 꽃바구니에 쓰여있던 문구는 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거든.
한 번도 '그런 연애'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는 내가 모르고 있던 어떤 종류의 다양함에 대해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던 것 같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그리고 어떤 날 급한 서류를 배달하고 나오는 길이었어. 그런데 A에게 전화가 걸려왔어. 바로 다음 택배가 예약되어 있던 나는 지금 매우 바쁘다며 전화를 끊어버렸어. 일이 끝난 뒤 퇴근하는 길에 아까 끊었던 게 생각나 A에게 전화를 하니 안 받더라.
A가 나에게 했던 전화의 대부분은 새벽에 술에 취한 채 걸려 오던 것 뿐이었어. 그래서 낮에 전화하는 게 뭔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어. 그런데 A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또 한동안 전화가 없었지.
그때쯤이었을까. 나는 A에게 궁금한 게 더 이상 없었던 것 같아. A는 나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A에 대해서 궁금한 게 별로 없더라고. 그때는 몰랐어. 내가 궁금한 게 없다는 건 그 사람이 내 마음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택배일을 시작하고 2주 만에 4킬로가 빠진 나는 놀라운 다이어트 효과에 기분이 좋긴 했지만 지하철 택배는 오래 할만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나는 아직 많이 어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엄청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낮에 하는 일이 밤에 하는 일에 비해서 어떤 점이 나은지 잘 알게 된 나는 '낮에 하는 안정적인 일'이 하고 싶어 졌어. 그래서 집 앞에 있던 까르푸에 무작정 찾아가 봤어. 엄마가 돈 만지는 일을 하다 실수하면 다 물어내야 한다며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렇게 큰 대형마트에서 캐셔 외에 내가 할 일 하나 없겠냐는 생각이었지. 사무실에 찾아간 나는 직원을 구하는지 물어봤어. 그때 나는 대형마트에서 하는 일은 물건을 나르고 진열하는 일과 캐셔, 두 가지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엄마도 내가 까르푸에 일자리를 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 내가 캐셔를 할 거로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마침 직원을 구한다고 했어. 그런데 캐셔도 아니고 물건을 나르는 일도 아닌 '비서'가 필요하다는 거야.
내가 직원을 구하냐고 물어봤던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는 유니폼 입은 직원이 하는 일이었지. '비서'라고 하면 그럴싸해 보이는데 '점장님 비서의 비서'라고 해야 하나. 안내데스크에 앉아서 대표전화를 받아 안내를 해주거나 직원들이 요청하는 전화를 연결하는 게 주된 업무였어.
까르푸는 대부분의 점장이 본사에서 파견된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래서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한국인 비서가 있었고 그 사람이 비서실장, 그리고 비서실장이 관리하는 부서가 리셉션이라고 불리는 내업무, 그리고 인사팀과 디자인팀이었어. 그러니까 비서팀에 소속된 직원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까르푸에서 일하면서 나는 점점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A의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전처럼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전화가 오면 그냥 반갑게 받아줬어.
그리고 새벽에 걸려온 전화에 나는 아침에 출근해야 해서 나갈 수 없다며 무려 '거절'을 하기도 했지. 허겁지겁 나가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어. 돈이 없으면 언니 지갑을 뒤져서 돈을 훔쳐가던 짓도 더이상 하지 않았어. 그리고 더 이상 A에게 궁금한 것도 없었지.
어떤 '우연'으로 시작했던 우리의 교집합은 자연스럽게 공집합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면서였을 거야. 그리고 그 놓기 힘들었던 감정들에 무뎌질 때도 됐다고 느끼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난 시간 동안 그곳에 있던 '우리'를 잃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그때의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어.
그동안 내가 못 들은 척하며 귀를 막고 싶었던 걔가 나에게 해줬던 믿기 어려웠던 어이없는 이야기들 말이야.
어느 날 A는 경찰서에 다녀왔다고 했어. 무슨 일로 다녀왔냐고 했더니 아는 동생 여자애가 있는데 보호자로 와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 여자애는 부모님이 없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여자애는 미성년자인데 원조교제를 했고 그게 어쩌다 걸려서 경찰서에 갔대. 그 여자애는 자긴 남자 친구가 있다며 발뺌을 했고 그 증거로 A를 불렀다는 거야. 그래서 A는 내가 '남자 친구'라고 말했고 어찌어찌 풀려났다고 했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단어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원조교제'라는 단어가 굉장히 불쾌했어. A가 그여자애의 '남자 친구'라고 했던 것보다 훨씬. 원조교제를 하는 아는 여동생이라니... 도대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남자를 아는 건가 싶더라고.
그리고 A는 중학교를 자퇴했다고 했어. 뭐 학교를 중퇴하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 중퇴라는 건 조금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 누구나 한 번쯤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잖아. 그런데 뭐 좋은 일로 그만둔 거 같진 않더라고.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그냥 느껴지는 거니까.
그런데 더 가관인 건 볼레로에서 일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나이트클럽을 관리하는 깡패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대.
그래 나도 알아. A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말이야. 나도 알고 있었지.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도 과장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들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그냥 웃으라고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A는 그 깡패 밑에서 일하다가 그 깡패 두목이 사람 죽이는 걸 본 적이 있다는 거야. 그 두목이라는 사람이 뒷골목에서 어떤 사람을 칼로 푹 찌르더니 A에게 그랬대.
"사람 죽는 거 처음 보지? 넌 이런 데서 일할 애가 아니니까 다시는 오지 마라"
...
웃어도 돼...
나도 그때 얘기 들으면서 속으로 엄청 웃었으니까.
A가 허세도 있고 거짓말도 잘하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A가 나에게 했던 그 뻥들을 떠올리니까 너무너무 웃긴 거야.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서 아련한 마음으로 우리의 과거를 추억하다가 A의 뻥 잔치가 떠올랐고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실실 웃다가 급기야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어. 그리고 생각했지.
'내가 그런 애를 좋아했다니 말도 안 돼.'
나는 현실에서 점점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고 A를 생각하는 마음도 점점 객관적이 되어가고 있었어. 그때의 아련했던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사람들이야. 그때의 우리는 사라지고 지금은 '현재의 나'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었지.
내가 A를 더 이상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도 걔와 잠은 잘 수 있었어. 그런데 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A는 내가 못 잊을 만큼 좋은 잠자리 상대도 아니었단 말이지. 그래도 어느 정도 유종의 미를 거두는 차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정말 더 이상 A에게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일종의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겠다. 얼굴을 안 보니 마음이 멀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겠고, 그래서 A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고 더 이상 A를 향한 나의 마음에 작은 애틋함마저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 그래서 여느때처럼 변함없이 술에 취한 목소리로 걸려온 새벽 전화에 나는 A를 만나러 나갔어.
그날따라 A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어. 우리가 일하던 볼레로 앞 골목에서 '주정차 금지'라고 쓰여있는 노랗고 검은 줄무늬가 그려진 쇠기둥 위에 흐느적거리며 앉아있는 A를 발견했지. A는 나를 보면 반가운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렸어. 술에 취해 풀린 눈을 하고는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꼭 끌어안더라고.
아마 예전의 우리였다면 가끔 보는 사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애틋한 몸짓으로 서로를 안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익숙하게 모텔로 들어갔겠지.
그런데 그 때.
A를 안고 가만히 서 있던 내 몸이 갑자기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쉽게 설명하자면 '유체이탈'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A를 안고 있는 내 몸에서, 투명한 또다른 내가 빠져나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 채로 저 밑에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거야.
투명한 나는, A를 안고 있는 나를 한심하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
'아직도 모르겠어? 이제는 정말 아니라는 거 너도 알지? 더 이상 너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들지 마. 너는 걔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이제 더이상 걔도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나에게 'A에게는 내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았던, 비로소 우리사이를 객관성을 갖추고 바라보게 된 확실한 순간이었던 거지.
그리고 '나를 위한 사람은 오직 나'라고 느끼게 된 중요한 경험.
그래서 나는 더 이상 A를 맴도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A가 더 이상 내 머릿속을 맴도는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결정했지.
우리는 서로에게 '맴도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
그를 맴돌며 내 마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었던 나는, 내 전화번호를 바꾸는 걸로 나의 변한 마음을 A에게 다시 증명하기로 했지.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더 이상 맴돌지 않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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