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걔를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이렇게 모르는 척 운을 띄어도 사실 그날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날을 잊을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향미 언니와 호준 오빠가 말도 없이 하룻밤 새 볼레로를 그만두고, 얼떨결에 그들의 사랑의 희생자가 된 숙이 언니와 나는 둘이서 한층 바쁘게 볼레로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호준 오빠를 대신할 남자 아르바이트생을 급하게 구하던 차에 오전에 일하던 우혁이의 친구가 면접을 보러 왔다는 말을 숙이 언니가 해줬어.
"내일부터 출근한대"
"근데 엄청 무섭게 생겼어. 손님들이 좋아하려나 모르겠다. 처음에 권투선수인 줄 알았어. 눈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권투선수같이 생긴 건 어떤 건지 잠깐 궁금하다가 숙이 언니와 힘들게 옮기던 100리터짜리 쓰레기통을 옮겨줄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온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던 것 같네.
그리고 다음 날, 정말 무섭게 생긴 A가 눈앞에 나타났지. 무섭다기보다는 표정이 없고 가늘게 찢어진 눈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 그리고 키가 정말 컸어. 내 앞에 서있으면 걔의 그림자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진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어깨도 넓었어. 음... 그리고 목소리가 좋았어.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느낀 건 A도 나처럼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으며 살았구나. 내가 갈빗집이랑 하이트광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사장님이 제발 좀 웃으라고 너는 표정이 왜 그러냐고 항상 혼났거든. 혼나기 전까지 내가 무표정하다는 것도 몰랐고 아무 일도 없는데 웃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았지. 그래서 A에게 조금은 공감이 됐달까. 아, 그리고 A는 나랑 동갑이었어.
A는 태어나서 처음 아르바이트를 해본다고 했어. 그래서 모든 게 서툴렀어. 그래도 내가 일을 가르쳐주면 곧잘 하더라고. 숙이 언니, 며칠 전 새로 온 바텐더 희진 언니와 함께 우리 넷은 금세 굉장히 가까워졌고, 사장님이 없어도 볼레로는 잘 굴러갔어. 원래 일하는 직원끼리 친해지면 사장님의 터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죽이 척척 맞거든.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고 그만큼 수다 떨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게 되는 거지. 가끔 손님이 없으면 우리는 가게에서 말뚝박기까지 하고 놀았다니까.
A는 무서운 첫인상과 다르게 정말 말을 재미있게 했어. 사투리를 머금은 사장님 말투를 흉내 낼 때마다 숙이 언니와 나는 빵 터지곤 했지. 밀린 설거지를 할 때는 항상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를 흉내 내며 고무장갑을 힘겹게 꼈어. 손이 엄청 커서 고무장갑이 꽉 끼는 바람에 마치 수술 장갑을 낀 것처럼 보였거든. 그리고 사뭇 진지한 말투로 나에게 "간호사, 메스!!"라고 외쳤어. 가끔 더러운 컵들을 심폐소생술을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난 그게 그렇게 웃기더라고.
그때 나는 볼레로가 내 일상의 전부였어. 새벽 4시에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유머사이트에 올라온 투데이 유머를 읽으면서 낄낄대다가 잠이 들어서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나면 바로 출근 준비를 했지. 마스카라로 한 올 한 올 정성껏 속눈썹을 고정하고 고데기로 머리에 웨이브를 넣으며 내 인생 최대치의 공을 들였던 외모에 집착하던 시기였어. 엄마는 내가 출근을 하면 퇴근을 했고, 내가 자고 있으면 출근을 했고, 언니는 대학생이 되면서 놀랍도록 예뻐지는 바람에 연애를 미친 듯이 하느라 집에서는 잠만 자고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어.
나는 돈을 벌면서 더 이상 구차하게 엄마한테 용돈을 달라는 말을 안 하게 돼서 좋았고, 엄마도 좋아했던 것 같아. 아니, 엄청 좋아했어. 우리가 살던 구질구질한 일곱 평짜리 영세민 아파트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어. 언니가 아침마다 일곱 번 정도 입었다 벗어놓은 옷을 그대로 널 부러트린 채 나갔기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아무도 치우지 않고 방치됐지. 그리고 엄마는 더 이상 우리의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회사와 가까운 남자 친구네 집에서 보냈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기준에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집의 느낌은 아니었어. 항상 떠난 자리가 느껴지는 장소였어 우리 집은.
그래서 난 매일 조금 이른 출근을 하곤 했어. 내가 그때 숙이 언니를 참 좋아했거든. 일할 때 손발도 잘 맞고 배려심이 많은 숙이 언니는 나보다 두 시간 일찍 퇴근을 했는데 나는 언니와 조금 더 수다를 떨고 싶어서 일찍 출근해서 일을 더 하곤 했지. 그때의 볼레로는 일터가 아닌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곳 같았어. 그래서 일이라는 생각도 안 들었고, 볼레로의 모든 업무는 손바닥 보듯 뻔하니까 말이야. 나에겐 볼레로의 모든 일들이 쉬웠어.
대학생이던 숙이 언니가 개학을 하면서 그만두던 날, 그동안 정이 너무 많이 들었던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아쉬움을 말했지. 그 후로 가끔은 만나서 놀기도 했는데 좋은 대학에 다니던 숙이 언니와 어린 사회인이었던 나의 상황은 많이 달랐어. 대화할 수 있는 주제의 공감대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연락을 주지도, 받지도 않게 되었지.
어쨌든.
숙이 언니가 그만두고 아르바이트가 구해지지 않아서 A와 나는 둘이 일을 하게 되었지. 바텐더 희진 언니가 우리 일이 바쁘면 잘 도와줬기 때문에 A가 오기 전 숙이 언니와 둘이 할 때보다는 덜 힘들었어.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새로 사람을 뽑을 생각을 안 하더라고. 그렇게 A와 나는 둘만 계속 일을 하게 됐어.
그러니까.
이다음은 뭐 그냥 흔한 어린애들 연애 이야기야. 그런데 나에게는 조금 특별할 수도 있겠지. 내 얘기니까.
만약 나에게 사춘기가 언제였냐 물으면 나는 '스물한 살의 나'였다고 말할 것 같아.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던 시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가정이란 미성숙한 인간에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그때는 몰랐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가장 가까이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함께 보내는 이성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는 거? 그런데 그때는 몰랐지. 나는 몸만 큰 미성숙한 인간이었다는 걸
법적으로는 성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있었고, 제재를 받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70만 원쯤 되는 월급을 받으면 일찍 마감을 하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어. '양주'를 말이야. 웃기지? 나도 웃기다. 볼레로에서는 양주를 팔았잖아. 그런데 우리 나이에 그런 위스키들을 접하고 이름을 알고 가격까지 꿰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닌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지. 우리는 매일 밤 술에 취한 어른들을 봤고, 사장님과 실장님의 친구들이 놀러 와서 야한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는 걸 보면서 어른은 다 그런 건 줄 알았어. 자유롭고 쿨 해 보였지. 그리고 퇴근해서 가게를 나서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어른들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어.
우리는 종종 일을 마치면 아침 7시까지 술을 마시다가 근처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모텔을 가고, 자고 일어나서 출근을 했지. 월급을 받으면 길어야 일주일이었어. 양주를 마셨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한 달에 일주일은 외박을 하는 나의 안부를 엄마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언니도 그랬지.
A는 나에게 사귀자는 말을 한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나는 '사귄다'는 건 우리 사이를 정의하기엔 부족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어. '오늘부터 1일' 이딴 건 유치하다고 생각했어. 난 쿨하니까. 그리고 어른이니까.
가끔 만나는 걔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여자 친구'라고 불린 적도 없었지. 여느 때처럼 월급을 타고 양주를 마시던 자리에서 처음 본 A의 친구가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했어. A는 침대에 누운 채 배에 올려놓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어.
"걔랑 잘해봐."
음. 그러니까 나는.
나의 첫 키스와 첫 섹스가 A여서 나의 모든 걸 어쩌고.. 몸도 마음도... 어쩌고...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A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도 아냐.
A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느끼면서도 아주 적은 가능성이나마 나와 멀어지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인 걸까.
사람의 마음은 '진심'이라는 한마디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작은 진심'과 '큰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A가 날 좋아하는 진심은 작지만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진심을 뒤로하고 쿨한 척, 어른처럼, 자유로운 사람처럼 '네가 좋다면 걔랑 사귀어도 된다'는 허락하는 듯하면서 나의 마음을 떠보는 제스처가 나에겐 상처가 되었지.
그리고, 영화 한 편 찍었지 뭐
다들 연애하면서 영화 몇 편씩 찍잖아?
"그럼 걔랑 사귈까?"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말해?"
"미안해"
"난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넌 아니었어?"
"나도 너 좋아해"
그제야 진심을 확인한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펑펑 울고 뭐 그런 싸구려 영화 있잖아.
그런데 그다음 영화는 더 가관이지.
1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으니까.
-2편에 계속-